파이로-SFR
원자력발전소의 사용후 핵연료(폐연료봉)를 차세대 원전인 소듐냉각고속로(SFR)의 핵연료로 재활용하는 기술.
한·미 원자력연료주기공동연구(JFCS) 운영위원회는 미 아이다호연구소, 아르곤연구소와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지난 10여 년간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JFCS 보고서를 2021년 8월 최종 승인했다. JFCS 운영위는 미 국무부, 에너지부, 핵안보청과 한국 과학기술정통부(과기부),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참여한다.
JFCS 보고서는 파이로-SFR의 기술적 타당성, 경제적 실현 가능성, 핵 비확산성에 대한 근거를 담은 방대한 연구자료로 1000쪽에 이른다. 구체적 내용은 양국 간 협의에 따라 공개되지 않는다. 보고서는 “파이로-SFR이 상용화를 위한 후속 연구에 들어갈 단계가 됐다”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파이로-SFR은 핵폭탄 연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것이 불가능한 건식 공정이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2021년 6월 ‘미래 에너지산업의 게임체인저’라며 공동 개발을 천명한 원전도 SFR이다.
"韓, 파이로-SFR 원천기술 세계 첫 확보"
사용후 핵연료는 엄청난 방사선을 내뿜기 때문에 여러 저장 단계를 거친다. 먼저 원전 내 수조에 임시로 뒀다가(습식 저장) 5년 정도 지난 후 건식 저장시설(콘크리트 무덤)로 옮겨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추가 중간저장을 거쳐야 하며, 지하 500m 아래 완전히 파묻을 수 있는 특수시설(URL)도 필요하다. 스웨덴, 스위스, 핀란드, 프랑스, 일본 등은 URL 운영을 시작했지만 국내엔 중간저장시설과 URL이 전무하다. 현재 모든 폐연료봉은 원전 내에 쌓아만 두고 있다. 2021년 6월 기준 1만7578t이 저장돼 있다.
문제는 저장시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용후 핵연료 축적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북 경주 월성원전 1~4호기 포화율은 6월 98.2%에 육박했다. 당장 2022년 3월 ‘강제 셧다운’에 들어갈 판이다. 경북 울진 한울1~6호기는 86.9%, 부산 기장 고리1~4호기와 신고리 1·2호기는 83.8%, 전남 영광 한빛1~6호기는 76.2%에 달한다.
파이로-SFR은 이 ‘골칫거리’를 해결할 길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다. 폐연료봉의 ‘초우라늄 원소(TRU)’를 핵 비확산 기조에 맞게 안전하게 처리해 사용전 핵연료로 재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TRU는 수만 년이 지나도 강한 방사선을 내뿜는 고(高)독성 장반감기 핵종(플루토늄, 넵투늄, 아메리슘, 퀴륨 등)을 말한다. 상용화하면 폐연료봉 부피와 질량을 각각 20분의 1, 50분의 1로 줄이면서 방사선량을 1000분의 1 이하로 감소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파이로-SFR은 폐연료봉의 1%가량을 차지하는 TRU를 추출한 뒤 SFR 원료로 재투입해 탄소 배출 없이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JFCS 보고서는 특히 한·미 공동 연구진이 1회당 사용후 핵연료 4~5㎏을 처리할 수 있는 파이로-SFR 원천기술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과학기술은 기초연구→실험실→공학 연구→실증 연구 및 상용화로 발전한다.그런데 정작 기술개발 주체인 과기부의 입장은 명확치 않다. 본지 보도 직후 “JFCS 보고서는 한·미 간 연구 과정과 결과를 기록한 것으로, 파이로-SFR의 타당성 등에 대한 결론을 담고 있지 않다”고 설명자료를 냈다. 이어 “실증 연구 및 상용화 계획은 마련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양국 원자력 최고 전문가들이 지난 20여 년간 연구해 미국 승인을 받은 보고서를 두고 과기부가 ‘결과는 있는데 결론은 없다. 후속 연구를 할지도 아직 모르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입장은 엇갈린다.
문재인 정부 초대 원자력안전위원장을 지낸 강정민 핵컨설턴트는 2021년 9월 2일자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파이로프로세싱 공정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발생을 고려하면 파이로프로세싱으로 방사성 폐기물의 20분의1로 감축한다는 원자력연구원의 주장은 거짓”이라며 “미국 정부가 공동연구에는 응했지만 파이로프로세싱을 핵확산 위험을 초래하는 재처리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상용화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과기부의 이런 애매모호한 태도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기조’를 의식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파이로-SFR이 발전하면 ‘원전은 위험하다’는 논리의 한 축이 무너지기 때문에 연구 성과를 애써 축소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과학계 한 원로는 “파이로-SFR은 과학의 영역이며, 정치가 범접해서는 안 될 진리의 세계”라며 “혹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때문에 결과를 은폐하는 것이라면 이는 중대한 문제”라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파이로-SFR이 향후 세계 원전 시장을 주도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인도 등은 이미 파이로-SFR 개발에 한창이다. 과기부는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앞으로 연구 방향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위원회는 비(非)원자력계 인사들로 꾸려질 전망이다.